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왕과 비 (문단 편집) == 여담 == 조선의 국왕이 가장 많이 등장한 사극으로, 세종부터 문종, 단종, 세조, 예종, 성종, 연산군, 중종에 이르기까지 8명[* 추존왕 덕종까지 포함하면 실직적으로는 9명.]이 등장한다. 원래 제목은 <바람의 생애>였으나 [[일본]] [[NHK 대하드라마]] 중 [[꽃의 생애]]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<왕조의 계단>으로 바뀌었다가 이것도 너무 추상적이라는 이유로 지금의 것으로 낙착되었다. [[1997년 외환 위기]] 시기다 보니 [[http://dna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99021200209111007&edtNo=45&printCount=1&publishDate=1999-02-12&officeId=00020&pageNo=11&printNo=24118&publishType=00010&doNotReadAnyMore=notClose|1분 촬영에 160만원을 들여서 비판받기도 했으며]], 오프닝 테마곡을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[[용의 눈물]]의 테마곡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.[* 본작이 기획된 이유도 <용의 눈물>의 후속작으로 [[박정희]] 시대나 [[삼별초]]를 배경으로 한 사극을 제작하려고 했는데, 복장과 세트를 새로 제작할 여력이 되지 않았던지라 이전에 썼던 세트와 복장을 재활용할 수 있는 조선 초기 사극이 채택된 것이었다. 만약 삼별초를 배경으로 한 사극의 제작이 성사되었다면 [[태조 왕건]]이 아니라 해당 사극이 최초로 고려시대([[여말선초]] 제외)를 다룬 KBS 대하드라마가 되었을 것이다.] 막판에 [[연산군]]이 깽판을 치며 피를 부르는 장면에선 [[망나니]]의 칼질과 함께 땅을 구르는 머리라든가 [[부관참시]], [[거열형]] 등 지상파에서 방영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고 폭력적이고 잔인한 장면들도 여과없이 방영되었는데, 연산군이 철퇴로 아버지의 후궁들을 직접 내려치는가 하면 연산군에게 모욕을 주자 아예 갈퀴 같은 것으로 얼굴을 쳐 살점이 너덜한 장면이 나온다. 당초 1999년 12월 말 끝낼 예정이었으나 후속작 [[태조 왕건]]의 담당 PD로 낙점된 [[김재형(PD)|김재형]]에 대한 검찰 수사로 인해 촬영에 차질을 빚게 되자[* 1996년 8월부터 1998년 5월까지 [[용의 눈물]] 촬영 당시 조연급 탤런트들로부터 금품을 받았다는 이유 탓인지 1999년 8월 19일 배임수재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고, 결국 <태조 왕건> 연출 명단에서 손을 떼야 했으며, 1999년 11월 26일 서울지검으로부터 징역 2년, 추징금 1,612만원이 구형되었다. 김재형 PD는 그 이후 타 방송사로 처음 옮겨 연출했던 [[SBS]] [[여인천하]]로 재기에 성공했다.] 2000년 3월에야 간신히 막을 내렸으며, 이 과정에서 <왕과 비>는 담당 PD 김종선이 <태조 왕건> 연출자로 발령되어 하차하는 대신 윤창범 연출로 변경됐다. 이 과정에서 성종의 즉위에서 막을 내리려던 계획도 틀어서 폐비 윤씨와 연산군이 등장하는 등 186회까지 연장되었지만 오히려 [[시청률]]이 크게 상승하기 시작했고, '''최고 시청률인 44.3%를 달성'''한 날도 바로 이 때였다. 보통 일부 인기 높은 드라마들이 무리하게 [[연장방송]]을 했다가 시청률이 오히려 떨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던 걸 고려하면 다소 특이한 사례. 막판에 높은 시청률로 히트를 친 만큼 드라마 종방 이후 종방연을 KBS홀에서 개최하기도 했다. 자사 드라마들 중 대중적으로 주목도나 시청률이 높았던 히트작 드라마들의 종방연의 경우 직접 사장까지 같이 참석하면서 KBS홀에서 열어주는 KBS의 관례를 생각하면 방송사 내에서도 나름 히트작으로 대우해준 듯 하다.[* 전작 [[용의 눈물]]도 마찬가지로 종방연을 [[KBS]]에서 개최했고, 당시 국회 [[문광위]] 소속이었던 [[대한민국 국회의원]]들도 <용의 눈물>의 종방연에 참석하기도 했다.] [[중종반정]]으로 끝을 맺었는데, 이 드라마가 끝나고 11개월 후 [[서울방송|옆옆동네]]에서는 중종반정이 첫 장면으로 나오는 [[여인천하]]가 방영을 시작했다. 만일 <여인천하>가 KBS에서 나왔더라면 KBS판 [[조선왕조 5백년]]이 완성되었을지 모를 일. 게다가 실제로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던 채시라는 <여인천하>의 주인공 중 하나로 캐스팅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으나, 당시 [[임신]] 중이었던 탓에 고사했다. 종영 후 위성 채널 KBS KOREA와 케이블 채널 복지TV에서 재편성됐다. 2011년 12월, [[종합편성채널]]로 개국한 [[JTBC]]가 개국특집으로 편성한 드라마 [[인수대비(드라마)|인수대비]]는 사실상 <왕과 비> 리메이크 버전이라는 평도 받는다. 채시라가 그대로 인수대비로 출연한 데다가 주요 장면의 구성이 본작과 매우 유사하고 극작가도 같기 때문. [[용의 눈물]]처럼 아직 세트장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실제 서울의 고궁인 [[경복궁]], [[창덕궁]], [[창경궁]]에서 주로 촬영되었는데, 경복궁만이 주로 나왔던 전작 때와 달리 창덕궁과 창경궁도 화면에 나온다는 건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. 하지만 창덕궁에서 촬영할 당시 인정전 뜰에 LPG 가스통을 설치해놓고 야간 횃불 촬영을 하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는데, 다행히 화재가 난 일은 없었지만 수많은 시민단체로부터 비난을 받고 [[국회]] 국정감사에서 질타를 받을 정도였다.[* 이 당시 [[KBS]]는 지금보다 공영방송 성격이 훨씬 강했던 [[방송국]]이었기 때문에 ~~지금도 몰론 공영방송이긴 하지만 최근 행보들을 보면 글쎄...~~ 특히 수신료로 제작되던 대하드라마의 경우 국감에서 제작 과정에 대해 국회의원들이 짚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. 후속작 [[태조 왕건]]의 경우도 [[강신성일]] 당시 [[한나라당]] 의원으로부터 "제작비가 너무 많이 지출되었다."고 지적을 받은 적이 있었다.] 결국 이 때를 기점으로 고궁에서 촬영하는 것은 문화재를 훼손하는 일이라는 이유로 점차 기피되기 시작했고, [[문화재청]]에서도 촬영 허가를 쉽게 내주지 않기 시작했다. 이에 2000년대 후반 ~ 2010년대부터는 세트장이 적극 활용되기 시작하나, 워낙 수준이 떨어지는 촬영장이 많은지라 고궁에서 다시 사극이 촬영되기를 바라는 목소리도 있다. [[BGM]] 중에서는 <한명회>나 <[[서궁(드라마)|서궁]]>, <용의 눈물> 등에서 나왔던 것을 재사용하는 경우도 많은데, 굳이 본작 뿐 아니라 <태조 왕건>이나 <[[명성황후(드라마)|명성황후]]> 등 이 당시 KBS 사극들이 전반적으로 공유하던 특징이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